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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거사총평2] 익산거사의 개혁 신학적·교단 정치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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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포커스 발행인 송삼용 목사, 제102회 총회에서 벌어진 익산 거사에 대한 개혁신학적 교단 정치적 평가 내려
2017.10.29 20:30 입력

  

  

지난 제102회 총회시 벌어진 교권 실세의 퇴출에 대한 갖가지 평가들이 나왔다. 그 중 에서 눈에 따는 평가 중에 하나는 총신측과 일부 세력들이 손을 잡고 거사를 꾸몄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런 평가를 뒷받침할 뚜렷한 증거가 없으며, 또한 사실도 아니다. 

 

지난 [익산거사 총평1]에서 위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한 바 있다. 크리스천포커스의 분석과 평가와 의하면 익산 거사는 교단 정치권이 결집한 사건이거나, 총신측과 손잡고 이룬 거사가 아니었다.

 

익산 거사는 교단 정치권과는 무관한 무정치, 무계파 인사들의 은밀한 노력과 희생 그리고 정의감과 교단을 사랑하는 충정에 의해서 치밀하게 준비되었으며, 이를 수용한 제101회 총회장의 성스러운 고퇴에서 이루어진 거사였다. 

 

이같은 주장을 담은 [익산거사 총평1]에 이어 이번에는 익산거사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 및 교단 정치적 평가를 써서 역사적인 거사에 대한 평가를 남기려고 한다. -편집자 주 -

 

첫째, 익산 거사에 대한 개혁신학적 평가

 

제102회 총회 당일 허 실세의 총대권 문제로 벌어진 격론에서 교권 세력 주변에서 외친 함성들을 볼 때 개혁의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미 계획된 발언과 격론이 예상한 그대로 진행되었지만 목소리에 밀리는 듯한 분위기였다. 

 

거기에다 총회장의 의지가 꺾어지면 개혁은 물건너 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였다. 그 순간 김창수 총무가 서기에게 항의하면서 서기단의 마이크가 내동댕이쳐지고, 서기가 넘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김 총무가 총회장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아들고 말하려다 저지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총회장은 저녁시간까지 정회를 선언하고 해산했다. 총무의 회의 방해에 대해서 크포의 보도가 나가면서 여론은 급속히 반전되었다. 

 

김 총무의 회의 방해 사건은 교권 실세 추방을 놓고 격론할 때 뜨겁게 일어난 실세 그룹의 함성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저녁 시간에 강재식 목사가 총무 문제를 들고나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곧바로 이어진 표결에서 압도적으로 교권 실세 영구 추방 결의를 이끌어냈다. 

 

이같은 과정을 보면 무정치 무계파 인사들이 총회 개혁을 위해서 치밀하게 준비하고, 분연히 일어나 발언했지만 모든 분위기는 하나님께서 하나씩 이끌어 가신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날과 달, 그리고 분과 초”까지 다루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욥기서에 나타난 개혁신앙적인 고백이다.

 

이번 거사에서도 개혁을 위해 치밀한 준비를 거듭했지만 최종적인 결정을 하기까지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결국 고퇴를 두드리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개혁을 이루신 분도 야훼 그분이셨다. 

  

둘째, 익산 거사에 대한 교단 정치적 평가

 

익산 거사는 교단 정치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단 정치권의 역사는 장로교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1. 교단 정치사 개관

  

박형룡의 개혁신학을 계승한 정치와 신학의 지도자 정규오 시대

 

간략한 개관을 보면 박형룡의 개혁신학과 장로교 정치를 계승하여 교단에 정착시킨 분은 정규오 목사다. 

 

정규오 목사는 신학교 입학 전부터 박형룡의 근대신학난제선평을 독학으로 숙지할 정도로 박형룡 신학에 능통했다. 

 

신학교 시절에는 51인동지회를 조직하여 박형룡 신학 계승에 일조했으며, 신학생 신분으로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주창한 김재준을 면직 처리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장본이이었다. 

 

그후 정규오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50년 후반부터 교단 정치에 나서서 교단에 개혁신학과 장로교 정치를 정착시켰다. 

 

특히 그는 1959년 제44회 총회 분열 후부터 교단 합동을 시도할 때마다 합동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합동 원칙에 "칼빈주의 및 장로교정치" 등의 조건을 제시하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면서 교단의 개혁신학을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합동에서 정규오 목사처럼 탁월한 정치와 신학을 겸비한 리더를 25년간 잃었던 것은 교단의 큰 손실이었으며, 그 결과 개혁신학과 장로교 정치의 퇴보를 가져왔다. 

 

개혁 신학을 정치로 이끌어간 정치 리더 이영수 시대 


정규오 목사의 신학과 장로교 정치의 균형잡힌 리더십에 도전장을 내던진 정치권 인사가 이영수 목사다. 70년대 초반 그는 정치신예로서 총회 서기단에 진출하여 교단 정치권을 주름잡았다. 그러면서도 이영수 목사는 총신대 양지캠퍼스 조성, 총회 회관 건립, 통일 찬송가 발행, 총회 선교훈련원 설립 등 교단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영수 목사는 교단 정치권을 장악한 후 교권을 행사하는 도가 지나쳐 일인 독주 시대를 이끌어가다가 79년 제64회 총회에서 교단이 나눠지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당시 이영수 세력은 전남노회 정규오 목사측의 총대 천서를 제한하고 출입을 봉쇄하면서 결국 정규오 목사를 중심한 비주류 세력이 총회를 떠나 새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특히 이영수 목사는 교단의 개혁신학을 정치로 이끌면서 개혁신학을 퇴색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정규오 목사가 개혁신학에 입각하여 교단 정치를 한 반면, 이영수 목사는 정치의 무기로 개혁신학을 내세우면서 총신을 우지좌지했다. 

 

가령, 이영수 목사의 허락만 있으면 어떤 사람도 총신 교수로 채용되었다. 총신대 총장을 역임한 영남의 김인환 교수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석사(M.div.)를 마치고 석사 과정(Th.M.) 중에 이영수 목사의 부름을 받고 교수로 채용되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80년대 초에는 총신에 박윤선 박사 등 기라성 같은 선배 석학들이 있었지만 이영수 목사의 주도 하에 30대 후반의 영남 소장파 정성구 교수가 총신대 학장으로 임명된 사건도 유명하다. 결국 교단 정치에 의해 개혁 신학이 억업받는 것을 못견디고 박윤선 박사를 비롯한 중진 교수들이 교단을 떠나 합신을 세운 것도 잘 알려진 사건이다. 

 

교단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허락이 없이는 총회 임원과 총회장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숱하게 회자되었다. 그런 식으로 이영수 목사는 정치권과 총신을 우지좌지하며 교단을 뒤흔들었다. 그뒤 제66회 총회장에 올랐으나 몇년이 못가 제70회 총회에서 정화파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부패 정치를 청소한 정화파 출현과 기독신문 주필로 교단 정치 장악한 한명수 시대

 

제70회 총회 때 교권 세력이 무너진 것은 교단 정화를 열망해 온 정치권의 김현중, 한명수 목사, 김인득 장로 중심으로 구성된 정화파의 승리였다. 당시 정화파는 교단 정치를 15년여 동안 장악하여 독주해 온 이영수 사단(4인방: 김동권, 홍태우, 손중호, 하구봉)을 무너뜨린 정치적 거사였다.  

 

제70회 총회 후 교단 정치권은 김현중, 한명수, 김인득 중심의 정화파 세력이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교단 정치의 실제적인 중심은 기독신문 주필의 자리에 오른 한명수 목사(우측 사진) 중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정치 신예 김영우 목사가 50대 초반에 기독신문 주필 경선에 나서 당선됨으로써 정치 중심에 선 듯 했다. 

 

김영우 중심의 정치 세력이 형성될 무렵 정치 그룹 사이드에 교갱협(교회갱신협의회)이 출현했으나 간접적인 영향 외에 교단 정치 전면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선거의 달인 길자연 시대

  

그후 길자연 목사를 중심으로한 영목회(영성목회연구회)가 교단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길 목사는 선거의 달인이라는 칭함을 받으면서 총회장과 총신 운영이사장, 한기총 회장 등의 선거에서 모두 이겨 교단 정치 중심에 섰다.  

 

길 목사의 정치력은 은퇴 후 칼빈대 총장과 총신대 총장으로 취임할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영목회는 길 목사 이후 그 정치력을 계승하지 못하고 영성 목회에만 주력하고 있는 모양새다. 

 

길 목사가 왕성하게 활동할 무렵 김영우 목사는 교갱협과 영목회 등과는 독자적으로 정치권의 5인방 세력을 구축하면서 사실상 교단 정치권을 주도하려고 시도했다(5인방: 김영우, 하귀호 문세춘, 김백경, 안기영). 

 

김영우 목사가 2003년 조직하여 활동한 개혁주의 목회자포럼의 임원과 전문위원을 5인방 중심으로 구성하여 다음과 같이 기독신문에 발표했다(기독신문 2003년 9월 18일자, 아래 사진).

 

▲고문: 증경총회장단 ▲회장:김삼봉 목사 ▲부회장: ---안기영 목사 ▲서기: 하귀호 목사 ▲회계: 김백경 목사 ▲총무:문세춘 목사 ▲전문위원=언론과 사회:김영우 목사(기독신문 주필, 서천읍교회) 

 

  

김영우의 5인방 구축 무산과 교단 정치권 장악 실패  


김영우 목사는 기독신문 주필에 있으면서 교단 정치를 장악해 온 한명수 목사의 길을 가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김영우 목사를 중심한 5인방은 정치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하귀호 목사는 GMS, 아이티, 총동창회 등의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했고, 김백경 목사는 교단 비리의 온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안기영 목사는 부총회장 선거에서 두 차례나 낙선하고 말았다. 결국 김영우 목사만 살아남아 총신재단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정치 라인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호남의 맹주 서기행 시대와 구개혁측과의 합동 수혜자 김영우

 

교단 정치사에서 서기행 목사를 빼놓을 수 없다. 서 목사는 1979년 정규오 목사가 주도하여 교단을 떠나갈 때 몇 안되게 남은 호남권 인사로서 호남 정치권의 맹주 역할을 해 왔다.  

 

25년 후 서 목사는 정규오 목사의 간절한 당부에 힘입어 구개혁의 홍정이 목사 등과 의기투합하여 교단 합동에 성공했다. 그후 구개혁과 호남은 총회 선거판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만큼 강력한 표를 갖게 되었다. 

 

가령, 제100회 총회시 부총회장 선거에서 박무용에게 몰표를 던져 준 것도 구개혁을 중심한 호남표였으나 박무용은 구개혁의 큰 도움을 배려하지 못한 채 배신의 정치로 일관했다. 

 

사실상 구개혁의 수장격인 호남의 한기승을 총신 재단이사직에서 박탈하려다가 불법 탈법을 일삼아 총신을 장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역풍을 맞아 결과적으로 15:0에 이어 총신을 김영우 목사의 손에 넣어 주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광주숭일 학원 법인 이사장이며 법학박사인 한기승이 재단 이사로 남았으면 총신 정관 변경은 막았을 것이라는 뒤늦은 관측이 나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김영우 목사는 배광식과 한기승까지 잃자 총신 이사의 자질이나 능력 등은 고려하지 않고 친세력들을 구축했다. 방어권의 차원에서 정관을 개정했다는 해명까지는 백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총신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살라 지키면서 마지막까지 사표를 제출하지 않은 김승동 이사장 대행을 토사구팽시켰으니 입이 천만개라도 더 이상 할 말을 못할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김영우의 총신 정치 구축사(史)

 

이런 정치권의 실상 외에 구개혁의 합동으로 최대의 수혜를 입은 이가 김영우 목사다. 김영우 목사는 총회 정치권에서 실패한 후 총신으로 건너와 악전 고투하고 있는 사이에 구개혁과의 합동이 성사되어 호남, 중부권의 강력한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김영우 목사는 구개혁측과의 합동으로 총신에 막 상륙한 후부터 호남 중부권의 지지를 동시에 받아 천군만마를 얻었다. 거기에다 목회 제자격인 배광식 목사, 한기승 목사 등이 총신 재단에 입성하여 좌우에 날개를 달았다

 

신학과 발언의 용병 대장으로 정준모 목사가 나섰고, 정치권의 행동 대장으로 박충규 목사 등이 포진했다. 결국 김영우 목사는 5인방 구축의 실패를 거울 삼아 총신의 새로운 전선 구축에 성공했다. 거기에다 호남권의 서기행, 김삼봉 목사 등과 연대하고, 구개혁측의 도움까지 입어 마침내 재단이사장 대행에 이어 이사장과 총장직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하지만 총신 외에 교단 정치권에서는 매번 참패했다. 특히 97파회 사건이 벌어지자 총신 재단의 동지들이 숱한 수난을 겪고 있을 때에는 정치권의 수면으로 잠수행을 택해 주변의 세력과의 신뢰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교단 정치권의 중심에 섰던 정준모 목사, 박충규 목사 등의 퇴장으로 행동대를 잃게 되었다. 더욱이 총신측 재단이사를 거부하는 정치권의 반격을 막아내지 못한 채 결국 주변 친호위대로 알려졌던 신학통 배광식 목사, 법통 한기승 목사까지 잃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교단 기형 정치의 달인 허활민 목사가 등장했다. 허 목사는 두 총회장(백박)을 힘입어 실세 행세를 하면서 교권을 장악한 후 총회 본부, 정치권, 언론을 차례대로 점령했으나 총신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자 허 실세는 김영우 목사의 측근 이사 퇴출에 목표를 두고 지속적으로 총신을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런 식의 정치권의 암투가 진행되는 사이에 총신의 김영우 목사는 자파의 세력을 구축하기보다는 정적이었던 허활민 목사와 손을 잡았다가 놓친 바람에 부총회장 선거에서 낙선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건이다. 

 

후일 허 실세는 크포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영우 목사의 후덕한 배려와 지원으로 백남선 목사에게 선심을 써서 그를 당선시켰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처럼 김영우 목사는 자파의 동지들을 앞세우면서 뒤에서 정적과 쉽게 손을 잡는 식의 정치로 나중에는 치명적인 수모를 겪었다. 

 

허 실세에게 배신당한 지 몇 년이 되지않아 다시 정적 박무용 목사와 밀월을 즐기려다 박목사에게도 배신을 당해 뇌물 사건에 휘말리는 참변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김영우 목사는 재단이사장, 총장에 이어 교단 정치권 장악을 위해 부총회장 후보로 두 번이나 나섰다가 낙선, 후보 탈락 등의 수모를 겪었다. 특히 김영우 목사는 주변에 포진된 우군 배광식, 한기승 등을 잃어 버리고, 적군으로부터 강한 반격까지 받게되자 새로운 재단 이사를 구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교단 정치권의 무주공산 시대와 기형 정치 세력과 교권 실세 허활민 등장


그런 상황 중에 교단 정치권을 주도할 리더가 거의 없었다. 제비뽑기 선거제도 탓에 정치권에 우후죽순처럼 총회장, 임원 후보들이 나왔지만 총회 헌법에 전무하고, 신학도 부재할 뿐만 아니라 리더십 자체가 흔들리는 정치권의 무주공산 시대가 되고 말았다. 

 

누구든지 후보로 나섰다가 제비만 뽑히면 고퇴를 이용해 교권을 휘둘렀다. 백남선, 박무용 총회장도 그 대열에 선 인물들이다. 두 총회장은 교권을 허활민 목사에게 내 주어 약 3년간 교권 실세 역할을 했다. 

 

허활민 목사는 총회장의 힘을 빌어 교권을 장악한 후 앞서 간 정치권 인사들의 흉내를 내면서 새로운 5인방(김상윤, 이형만, 윤익세, 김정호, 이종철: 5인방 명단은 본보의 분석과 평가에서 나온 명단임을 알림) 세력을 구축했다.  

  

  

허 실세는 5인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권 세력을 형성했으나 교권 장악 3년만에 영구 퇴출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차기 총회에서 허 목사의 부활을 예견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허활민 목사의 부활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그의 퇴출 결의는 정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총대들의 힘이 집결되어 이룬 결실이기 때문이다.

 

교권 실세를 무너뜨린 세력이 총신측과 연결되었다느니, 정치권의 작품이라느니 하는 사견들이 나오고 있지만 전혀 근거없는 추정일 뿐이다. 이번 익산 거사는 총신측이나 교단 정치권의 힘이 아니라 총대들이 힘을 모아 자생적으로 일궈낸 결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난 3년간 백박허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권 세력은 교단 역사에서 있어서는 안될 기형 교권 세력이다. 이들이 몰락되었다고 예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으나 익산 거사에서 보여준 총대들의 저력을 볼 때 백박허를 중심한 교권 세력이 부활하기는 역부족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계속). 

 

송삼용 목사/ 하늘양식교회, 크리스천포커스 발행인



김찬 기자 chantou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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